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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cycle diaries

11일째(8.15), 소록도 > 순천 > 여수 애양원 > 순천 >마산

08:52
찜질방에서 미역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나왔다.
제주도를 일주하고 나니 자전거가 바닷물의 영향으로 페달에 하얗게 소금기가 생겼고 체인과 기어에 녹이 슬었다.
뻑뻑한 느낌에 소리가 나는 것도 거슬렸지만, 무엇보다 앞, 뒤 기어가 저단으로 변경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09:24
근처 자전거포로 갔다.
사장님께 자전거를 점검받았는데 이내 자전거를 보시곤 자전거를 왜 이리 험하게 탔느냐고 하시면서 혼을 내셨다.
여기저기 조이고 기름을 칠하니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중을 대비해서 어깨너머로 잘 눈여겨봐 뒀다.
타이어 공기압도 측정해주셨는데 전국일주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공기압을 낮게 해서 다니느냐고 또 혼을 내셨다.
생활자전거만 타던 내가 그런 걸 어찌 알았겠는가! 암튼, 사장님께 좋은 팁을 배웠다.

두 번씩이나 혼이 나서 소심하게 수공비는 얼마나 드려야 하는지 여쭤보니,
공짜로 해줄 테니가 인터넷에서 녹동삼천리 자전거를 꼭 홍보해달라고 하셨다.
블로그용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까 수리하는 척 포즈를 취해주셨다.ㅋㅋㅋ








09:37
소록도 연락선을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과거 일제는 지형상 격리시킬 수 있으면서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쉽게 실어나를 수 있는 소록도에 갱생원을 세웠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 연락선을 타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바로 그 결과물이 아니냐라는 씁쓸한 생각을 해봤다.

운임은 왕복 1400원인데, 선원 아저씨께서 수익금 전액은 소록도 한센인자치회에서 관리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09:48
섬 입구에서 안내도를 살펴보니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립 소록도병원을 중심으로 해서 한센인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터전과 직원 관사, 학교, 교회 등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지역과 출입할 수 없는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 받았던 소록도 한센인들의 삶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김 받았던 여수 애양원 한센인들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한센인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을 성찰해보기 위해서 이번 여행을 계획했다.
또한 애양원에서 한센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기셨던 손양원 목사님의 삶을 숙고해 보기 위해서였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은 일제시대 세워진 신사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 갱생원 제4대 원장 슈호마사토(周防正秀)가 매월 1일과 15일에
한센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부부동거를 허가하는 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사 터만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신사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에 다소 놀랐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직원분들이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소록교회가 나왔다.









국립 소록도 병원 본관이 있는 곳까지 이르니 오른편에 '애환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자치권을 요구했던 협상대표자 84명이 8월 22일에 처참하게 학살을 당하였던 장소에
이로부터 참사 56년 만인 지난 2001년에 화장, 매몰된 유골을 발굴하고 한센인의 인권 회복을 소원하는 기념비를
2002년 8월 22일에 건립한 것이다.










국립 소록도 병원 본관 앞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바로 한센인들 생활 지역이기 때문이다.

병원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들어 가면 일제강점기 때 한센인들을 학대했던 일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현장인 검시실, 감금실, 역사관 등을 외부인에게 개방하여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고발하고 있었다.









검시실에 들어가 봤다.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 및 가족의 뜻과 전혀 관계없이 해부 당하였고, 한센병 환자 근절을 명목으로 단종수술이 시행됐다.
이것을 보고 한센인들은 '한센병 발병으로 한 번 죽고, 죽은 후 시체 해부로 두 번 죽고, 장례 후 화장으로 세 번 죽는다.'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단종수술을 받았던 한센인의 시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감금실로 들어가 봤다.
일제강점기 당시 요양원의 부당한 운영에 대한 반항한 환자들을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으로 인권을 침해한 장소였다.
쇠창살로 된 창을 바라보니 이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았을 한센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감금실 맞은 편에 있는 소록도 역사관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소록도의 연혁과 생활상에 대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사료는 제4대 원장이었던 슈호마사토에 관한 것이었다.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던 원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원생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오로지 원장 자신의 거만함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허울뿐인 구상을 내세워 한센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심지어는 자신의 동상까지 세우게 하여 참배하게 했던 것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생각했다.
'너는 환자에 대하여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소리치며 원장의 가슴에 식도를 꽂은 이춘상의
절규와 분노는 때마침 광복절인 오늘, 조국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센병 자료관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과거 학교 건물이었다.
지금은 한센병에 대해서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검시실 > 감금실 > 역사관 > 자료관 순으로 관람하고 나니 중앙공원이 나온다.
공원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제는 연인원 6만여 명의 한센인들이 강제동원되여 조성한 이 공원을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산 이름을 통해서도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을 만들겠다던 원장의 허울을 여실히 보여주고도 남았다.
공원이 슈호 원장 자신에게는 '부드러운 동산'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한센인에게는 결코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오히려 한센인들의 부드러운 손과 발을 생채기 낸 슬픈 학대의 현장에 불과하다.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반입하여 한센인들이 강제동원되어 식재하였을 수목들...







출처 : 네이버



해방 이후에 세워진 기념물들...
다미안 공적비, 구라탑(한센병은 낫는다), 예수상 등이 중앙공원의 슬픈 자화상을 그나마 위로해 주고 있는 듯했다.









공원 끝에 이르니 들어갈 수 없는 한센인들의 거주지역이 나온다.









소록도 구 녹산초등학교 교사.









운동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과 한센인들의 중앙교회.









선착장으로 다시 되돌아오니 들어올 때 보지 못했던 소록도 병원의 비전이 적힌 선간판을 발견했다.
일제강점기 때 한센인들에 대한 학대와 차별 그리고 지금도 남아 있는 한센병에 대한 무지, 편견, 차별, 소외 등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에 방문하여 기대 이상으로 자신을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한센인에 대한 무지, 편견,
차별 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30
녹동에서 낙안읍성으로 향할까 하다가
소록도를 둘러보고 나니 오늘 중으로 여수 애양원을 방문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버스로 순천까지 이동했다.









14:30
순천버스터미널 도착.









15:35
순천에서 1시간 가량을 달려서 여수 애양원 근처까지 왔다.
애양원은 여수공항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15:40
여수 애양원에 도착했다.
애양원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여수애양병원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라는 비문에도
잘 나와 있듯 과거 애양원의 가치를 이어받아 한센인들과 지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병원이었다.

애양원은 1909년 미국 남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한센병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애양원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센인을 사랑으로 양육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운영했던 소록도 갱생원이 한센인의 인권을 짓밟았던 것과 너무나도 대조되었다.

소록도의 중앙공원을 일제가 부드러운 공원이라 칭했던 것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애양병원에서 애양원으로 가다보면 토플하우스가 있었다.
1953년 세워져 한성신학교였다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고 있었다.









최초의 여자 병사.











애양원교회는 손양원 목사님이 제2대 목사로 부임하여 애양원 식구들을 헌신적으로 섬기신 교회였다.
손양원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1940년에 투옥되어 해방되기까지 옥중에서도 애양원의 신앙을
지켜내셨고, 해방 후 여순 사건과 6.25의 위기 속에서도 목사님의 흔들림 없는 신앙이 애양원의 신앙을 든든히 세우셨다.
애양원 식구들과 주를 위해 순교하신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다.









교회 정문에서 맞은 편에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환우들을 사랑하되 예수님 다음으로는 애양원의 환우들을 사랑했고,
1948년 여순사건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으신 사랑의 원자탄을 터트린 삶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구 애양원 건물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개조되어 하나님께서 한센인들을 사랑하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애양원의 다양한 발자취와 한센인들의 생활상 그리고 당시에 사용된 의료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박물관에서 나와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다보면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사랑의 원자탄을 통해서 만났던 손양원 목사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순사건 때 좌익 학생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한 아들 동인, 동신 형제를 감사하고
원수를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은 퇴각하는 공산군들에게 끌려가시다 순교를 직감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시다가
공산군의 개머리판에 온몸을 맞아 순교하셨다.
마치 스데밤 집사처럼 죽는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신 목사님의 삶은 '주님 만날 준비도 오늘 뿐이다'로 말할 수 있다.
주님 위하지 않고 항상 미루는 나의 모습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손양원 목사님은 정말이지 사랑의 원자탄, 그 자체이셨다.
내 삶이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마지막으로 손양원 목사님, 사모님, 아들 동인 동신의 순교자 묘지를 순례했다.
정말이지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을 향한 사랑에 이런 것도 있구나!
순교정신이란 이런 것이구나!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17:10
애양원에서 큰 은혜를 받고 순천으로 되돌아가던 길에 순천터미널 근처에서 뒷바퀴가 펑크나고 말았다.
아마도 공기압이 너무 높아서 충격에 약해진 모양이었다.
터미널에서 바퀴에 바람을 넣고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이동했다.

마산에 도착하니 바퀴에 바람이 다시 빠져 있다.
임시방편으로 다시 바람을 넣고 근처 찜질방을 서둘러 찾아 갔다.
오늘 자전거로 이동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많이 피곤했다.









이동경로 : 소록도 > 순천 > 여수 애양원 > 마산
이동시간 : 3h 38m 07s
평균속력 : 15.8km/h
최고속력 : 43.5km/h
이동거리 : 57.48km
누적거리 : 939.0km